건축설계 Ⅲ - 노유자설계 2주차

ARCHITECTURE/DESIGN Ⅲ 2022. 2. 21.

 

 

 

대지 조사를 좀더 자세히 할 필요가 있었다.

도심속에 살아가면서 마을이란 커뮤니티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골은 주변 컨텍스트가 적고 주거의 높이가 1~2층으로 비슷하며 슬레이트 지붕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회관은 이런 시골에서 마을이란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시골 마을회관을 보면 새마을 문고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활성화가 잘되어 있지 않아 책들은 잠을 자고 있다.

지난번 선정사유이다.

용강마을 설촌유래

용강 마을의 옛 이름은 웃무드내이다. 성씨별 입촌유래를 보면 안동권씨가 처음으로 되어 있다.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에서 세거해오던 병조좌랑견선생이 피난차 제주에 건너와서 지금의 화북동부록에 기거했는데 견성생의 손자 용서선생이 1637년 용감마을로 이거해 가족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남양흥씨가 권씨 가문에 장가를 들고 주저 물러앉아 살았고, 그 다음으로 제주고씨 영곡공파 지금 용강마을 원로회장 고병호씨 11대조께서 낙향해서 살기 시작했다. 1759예조좌랑 경주김씨 김용선생이 고씨 가문에 장가들고는 주저 물러앉아 살았다. 1776년경 여산송씨 창윤선생이 이주하였고, 1779년에 반수를 지내신 진주강씨의 선생의 아드님 세건선생이 이거하였다. 1824년 제주부씨 효자공둘째 아드님 사민선생이 낙향을 하는 등 1770~1800년대 집촌을 이루면서 남평문씨 연안김씨 등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사료된다.

현재는 약150세대에 약 4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

주민의 90%가 농업(감귤농사)을 하고 있음

고억지에 관한 전설이야기

용강의 대표적인 구전은 고억지 형제에 관한 전설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억지 형제는 용강마을 서쪽 형제구릉 주변 1397번지에 거주했다고 한다. 고억지 형제는 말 천필, 천두를 사육할 뿐만 아니라 하인들도 이삼십명씩 거느리고 살면서 법의 통제권이 미치지 못한 용강마을에서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하인들을 시켜 타지역 마을에 사육하는 소나 말을 닥치는데로 휩쓸고 와서는 자기것이라고 우겻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소나 말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낙인을 찍는 것이 여기에서 유래되ᄋᅠᆻ다고 한다. 고억지의 나쁜 소문이 관가에 알려지자 관가에서는 관군을 동원하여 역적으로 다스려 처형하고 전재산을 몰수했다. 그 후 고억지 형제가 살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우물을 만들었는데 그 우물을 형제못이라 칭하였고 고억지 하인들이 먹던 물을 종구릉이라고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용강마을의 마을자원

 

웃무드내 포제단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포제를 지낸다. 노승 두 그루 아래 현무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제단을 마련하였고, 비교적 널찍한 공간을 제장으로 확보하였다. 주위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축성하듯이 장방향으로 쌓아 울타리를 애워 둘렀다.

 

생태연못

용강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1770~1800년대 마을을 형성하여 소,말 등 가축을 사육하면서 인위적으로 우물을 파서 물을 먹이던 곳으로, 20157월 주민참여사업으로 시설물(아치교, 정자, 난간등)을 설치했다.

 

왕벚나무 자생지, 웃무드내 궤당이다

도로현황

 

 

도로현황
층별현황
대지현황
대지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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