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 Ⅴ (복합문화시설) - 1주차
건축설계 Ⅴ
복합문화시설
어느덧 다시 설계를 해야하는 시간이 왔다....
이제는 블로그를 제대로 작성해보려고 한다.
너무 과거에 설계했던 것을 작성하는 느낌이라서 기억도 잘안나기 때문에...

복합문화시설이란
복합문화시설은 일상 생활문화를 수용하면서 문화전문가는 물론 일반시민들도 쉽게 문화를 향유하고 체험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으며 다양한 문화기능이 상호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 패러다임의 변화에 순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이러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된 문화시설은 지역의 상징적 랜드마크로서 인식되기도 하며 더 나아가 관광객을 유입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매우 큰 주요시설로 각인되고 있다. 본 강의에서는 이러한 문화 패러다임의 변화를 선도하는 미래지향적인 복합문화공간의 바람직한 설계모형을 제시하도록 한다.
이번 설계의 진행방향은
매주 월요일이나 목요일 중 하루는 평가받을 과제의 개별적 작업을 하는 것이고
남은 하루는 분반한 반을 개별적으로 하영드리미를 통해 과제 평가를 하는 것이다.
게획단계에서는 프리핸드링을 이용하여 스케치북이나 바인더북에 단계별 과제를 자유롭게 작성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그림 그릴 생각하니까... 뭔가 신나기도하면서 이건 자유롭게 해줘야하는거 아닌가 생각이든다.
마감단계에서는 먼저, 프리핸드링으로 스케치북에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배치도 등의 초안을 완성하고 나서
CAD 및 다양한 그래픽 툴을 이용하여 최종판넬 완성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게...
우리는 SPC를 충족해야하기 때문에..... 화이팅
SPC란
건축학교육인증을 위한 건축설계 학생수행평가기준이다.
SPC – 무장애 설계
노약자 및 장애인 등을 포함한 다양한 건물 이용자의 요구를 고려하여 설계할 수 있다. 불특정다수의 건물 이용자는 다양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거나 일시적으로 제한된 신체 조건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특정한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의 접근이 제한되거나 이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대지 외부에서 대지 내로의 접근, 대지 내에서 건물 내부로의 접근과 건물내부에서의 이동 및 시설 이용에 장애가 없는 설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SPC – 안전 및 피난 설계
인명의 안전 및 피난 원리를 바탕으로 안전, 피난 등을 고려한 설계안을 작설할 수 있다. 평상시 이용자의 안전과 화재, 지진 등의 재난 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규정한 관련 규정과 건축법, 소방법등의 기준을 파악하여 적절한 피난계획이 반영된 설계안을 작성 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안전 및 피난 설계는 건물 내부의 어느지점에서나 외부 출입구 까지 뿐만 아니라 건물 출입구에서 대지 밖까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것을 포함한다.
SPC – 컴퓨터 응용 기술
설계단계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응용기술 및 통합 설계 방법을 이해한다.
설계의 각 단계에서 다차원 정보모델의 적용, 견적, 물량산출, 유지관리 , 이력관리 등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컴퓨터 응용기술을 이해한다.
건축개요
PROGRAM : 문화 및 집회시설
SITE :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33-13번지 외 4필지
대지면적 : 4,148 M2
용도지역 : 계획관리지역 ,특화경관지구
건축면적 : 제한없음 (법적기준 범위내 )
연면적 : 제한없음 (법적기준 범위내)
규모 : 설계자 제안 (법적기준 범위내)
설계 계획기준
대상지 주변현황을 분석하고, 대상지의 특성을 고려하여 제안
지역주민들과 방문객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제안
제안한 각 프로그램별 기능에 따라 필여한시설은 반드시 숙지하고 계획에 반영
대상지 주변현황과 연계한 외부공간계획 (예, 공원, 야외공연장 등)
이번에 월정리가 걸려서...
뭔가 어려울거 같다...
환경적으로는 좋지만 주변 컨텍스트가 너무적어서
자연적인 요소부분과
정말 마을 사람들과 관광객
그리고 자연을 어떻게 연결하는가가 중요한 키포인트이라고 생각한다.

아 참고로 필지랑 주변 대지를 나눈것은 토지이음에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http://www.eum.go.kr/web/am/amMain.jsp
토지이음
이음지도, 용어사전, 질의회신사례, 규제법령집, 주민의견청취 공람, 도시계획통계 제공
www.eum.go.kr
제주 월정리
월정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월정리는 올레길 20코스가 바로앞에 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모래가 많아 모래밭이 있을 정도다.
모래를 이불삼아 뿌리내린 당근을 볼 수 있다.
바람이 만들어낸 효과는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모래바람은 지붕을 땅아래로 보냈다.
월정리(月汀里)의 '汀'은 물가 정이다.
월정리의 뜻은 달월, 물가 정으로 달을 닮은 물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월정리를 걷다보면 사잇길들이 보인다 재미나..
대부분의 캐드 지적도는 국토지리정보원이란
사이트를 이용한다.
대지 사이트가 정해지면 국토지리정보원을 통해 우선 사이트를 보는 것을 우선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
http://map.ngii.go.kr/ms/map/NlipMap.do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선택 선택
map.ngii.go.kr
그리고 제주의 역사성을 찾는 좋은 사이트를 추천하자면
바로 고영청 선생님의 역사교실이라는 사이트인다.
http://www.jejuhistory.co.kr/index.php
고영철의 역사교실
www.jejuhistory.co.kr
정말 말도안될 정도로 다양한 제주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다음 내용들은 고영철 선생님의 역사교실의 내용들이다.
월정리 마을 유적
제주의 민간신앙은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화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월정리 해신제단(海神祭壇, 벨롱개해신당)
위치 ; 월정리 774-4번지. 월정리 마을 서쪽 해안도로변 양식장 앞
유형 ; 민속신앙
시대 ; 조선시대∼대한민국 시대
해신당, 벨롱개해신당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모시는 해신은 용왕과 선왕이다. 어부와 해녀들의 안전을 관장한다. 해신에게 별치의 풍어를 비는 제의인 그물코ᄉᆞ가 치러졌는데 무속식으로 하면 멜굿이라 했고, 유교식으로 하면 해신제라고 했다.
바닷가에 바짝 붙여 돌담을 쌓아 장방형으로 제장(祭場)을 마련했다. 북쪽 벽에 기대어 칸을 둘로 나누고 각각 제단을 마련했는데 서쪽은 상단으로 해신을 모시고, 동쪽은 하단이라 하며 바다에서 죽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정월 또는 2월에 마을제와 같은 날 제를 드린다. 해신제 제관은 마을제 제관과는 다른 사람이며 전 해(昨年)에 했던 사람도 하지 않는다. 제관은 마을제 제관들이 정성하는 장소인 도가에서 5일 정성을 한다.
제물로는 돌레떡, 해어(명태), 돼지고기, 채소 등을 쓴다. 해신제에는 개인 치성은 하지 않는다.
월정리 무주연대(멸실)터
위치 ; 구좌읍 월정리 797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
무주연대는 별방진에 소속된 연대였다. 이 연대는 월정리 옛 이름인 무주애를 한자차용표기로 쓴 無注浦 또는 無住浦를 따서 한자로 無注浦(無住浦)烟臺 혹은 無注(無住)烟臺라 했다. 이증의 《남사일록》에는 무주애연대는 무주애 서안에 있다고 했다.
무주연대는 동쪽으로는 좌가연대(직선거리 4.5㎞), 서쪽으로는 서산봉수, 함덕연대와 교신했다(제주의 방어유적)고 되어 있으나 서우봉(직선거리 10.3㎞)이 가로막고 있어서 함덕연대와는 직접 보이지 않는 위치이다. 따라서 서쪽으로는 가까운 입산봉수(직선거리 3.0㎞)와 응신했을 것이다. 소속은 별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월정리 용천동굴유물
위치 ; 구좌읍 월정리
시대 ; 삼국시대
유형 ; 선사유적
세계 최대 규모의 유사 석회동굴로 천연기념물로 가지정된 구좌읍 용천동굴에서 1300년전인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5년 6월 2일 오후 2시 구좌읍 용천동굴에 대한 현지조사를 벌였다.
월정리 포제단
위치 ; 월정리 1018번지
시대 ; 조선~현대
유형 ; 민속신앙
월정리 구좌중앙초등학교
위치 ; 구좌읍 월정리 100번지.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시대 ; 일제강점기
이학교는 조만간 대지조사과정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월정리 베롱개(포구)
위치 : 구좌읍 월정리 554-1번지의 동쪽 바닷가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유형 : 어로유적(포구)
월정리에 있는 포구는 옛 마을 이름 무주애에서 딴 이름 무주포였다. 제주삼현도에는 무주촌에 무주포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베롱개 포구를 월정포구라고 한다. 베롱개는 ᄆᆞᆯ물개와 새물개를 포함한다. 무주포=베롱개=월정포구.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옛 포구는 길에 거의 다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월정리 652-3번지의 동쪽으로 새롭게 포구를 확장하였다. 이곳은 원래 수중암반이 있던 곳인데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방파제가 되었다. 왕석으로 쌓은 방파제 위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2012년에 방파제를 확장하였으며, 2018년에는 포구 안에 쌓인 모래를 준설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꽤 많았었으나 오늘날에는 본격적인 어업에 종사하는 어선은 거의 없고 낚시관광용 작은 배들 5∼6척이 매여 있다.
월정리 해변(한모살)
위치 : 구좌읍 월정리 33-3번지에서 554-6번지 일대
시대 : 미상
유형 : 자연 지형
월정리 해변(月汀里海邊)을 주민들은 한모살이라고 부른다. 소규모의 포켓비치 모래가 부족하여 대개 헤드랜드(headland)와 헤드랜드 사이의 만입(灣入)에 초승달 모양으로 발달되어 있는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양쪽 끝이 한눈에 들어와 광활하기보다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pocket beach)로, 해변의 모래는 해저에서 유래한 석회질 성분(패각질 모래)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반암이 혼재하여 사빈의 연속성은 불량하다. 배후에는 10여 m의 사구가 발달해 있다.
한모살 일대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도내 최대의 멸치어장으로 각광받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멜 잘 들민 월정, 멜 안 들민 멀쩡'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월정리 해변에서 멸치잡이가 왕성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월정리에는 제주도 최초로 어업 조합이 만들어질 정도로 호황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한모살 부근에 큰 말뚝을 박고 1㎞ 밖 바다에서 그물로 가둔 물고기들을 잡아끌기도 했다.
월정리 해변 길이는 약 350m, 폭은 30m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래밭에 바위들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겨울철 북서풍에 의해 모래가 날리고 해안도로가 개설된 지금은 모래가 많이 유실되어 여기저기 바위들이 드러나 있다. 동쪽 끝에는 차광망을 덮어 바람에 의한 모래의 유실을 방지하고 있지만 옛날의 모래 높이와 현재의 모래 높이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 보인다.
해수욕장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해변을 따라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들이 증가하면서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 따르면 2010년 4월 육지 출신 세 여성이 운영하는 카페 '아일랜드 조르바'가 해변 경관 변화를 주도했다고 한다. 2014년 현재 300가구가 채 안 되는 마을에 일반 음식점 12곳, 휴게 음식점(커피숍 포함) 9곳, 민박(게스트하우스 포함) 19곳 등이 영업 중이다. 여름철에는 한모살이 더욱 붐비면서 마을 청년회가 튜브, 돗자리, 선탠 의자 등을 대여해 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월정리 마을성담1~4구역
위치 : 구좌읍 월정리 274번지와 265-1번지의 경계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담)
4·3 당시 구좌중앙국민학교는 무장대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던 9연대의 주둔지였다가 1948년 12월 29일에는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중대 단위로 지역 곳곳에 파견되면서 2연대 관할이 되었다. 2연대 2대대 11중대는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였다. 무장대와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작전을 바꾼 이승만 정권이 서울에서 서청단원을 모집해 그 해 12일간의 단기 교육을 마치고 제주에 급파한 군인들이었다. 이들이 성산포(성산동초등학교)와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러 가장 악명이 높았다.
당시 제주지역 실정을 전혀 모르는 특별중대에 의해 구좌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속출되었던 것이다. 학교에는 진보적인 교사들이 많았는데 특히 평대 출신인 김홍만 선생은 학교에서 군인들에게 매맞아 죽었으며 김지한 선생과 강영희 선생은 현재 마을포구인 ᄆᆞᆯ물개에 끌려가 총살되었다. 1949년 1월 8일 11중대 토벌대는 인근 한동리 주민 조대연(37세), 김봉선(36세), 송봉언(39), 임창손(22세) 등을 구좌중앙국교로 끌고 와 밤새 고문을 가하여 다음 날 학교 앞 비석거리에서 총살시키기도 했다.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고춘선(2007년 77세) 할머니는 4·3 당시 5·10 단선 때 입산도피했다가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군인에게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치고 일본 밀항을 감행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학교에 주둔하자마자 사람 묻으려고 학교 옆 밭에 구덩이를 팠어요, 그 선생님들 이름은 기억에 없으나, 마을 바닷가에 끌고 가 그 생사람을 대창으로 쏘니까 사람이 탁탁 튀죠. 그러다가 군인들은 총으로 쏘아 죽여 버리고. 우리 집에 살았던 선생님은 탁 쏘니까 그 창을 팍 심더구만, 어떻게 힘이 있었는지 그 창대가 부러졌어. 그렇지만 어떻게 해 그 불쌍한 선생님들.”
4·3 당시 구좌면 월정리의 상황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게 읍소와 상납으로 인명피해를 줄인 대표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1948년 11월 18일 벌어졌던 월정리 주민에 대한 함덕리에서의 학살사건은 마을 설촌 이래 최대의 주민 희생으로 남아 있다. 이 날의 일은 1948년 11월 중순쯤 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모아 16명을 추려내어 김녕지서로 끌고 간 다음 함덕 주둔군에 넘겨진 후 백사장에서 학살된 사건이다. 토벌대는 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씌워 월정리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이 날 희생된 사람들은 안두현(33), 우경식(29), 한덕종(27), 강태홍(24), 안중석(20), 곽찬오(17), 곽명원 등 16명이다. 함덕리에서의 주민 몰살 사건이 일어난 이후, 월정리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피 입산하게 된다.
1948년 11월 19일에는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구장인 박창하의 아내인 윤원길(34)과 어린 딸 박매화(3)를 살해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농업학교 학생인 강창익(21)을 죽창으로 살해하고 돌아갔다.
경찰들은 입산피신 중이었던 윤보옥을 마을회관 앞으로 잡아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 중순, 월정리 주민들은 북촌 사건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행히 희생은 없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음은 고봉수(2007년 87세) 할아버지의 말씀.
“모든 주민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노소로 분리한 후, 복면을 한 사람이 나와 주민들을 지목하기 시작했주. 운동장에는 수류탄과 총이 준비돼 있어서 죽일려고 한 거주. 조금 있으니까 지프차를 타고 온 한 중위가 '백성없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만류한 거주.”
당시 11중대 소속 서북청년단들은 주민들을 모아 놓고 뺨 때리기를 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할아버지와 손자간에도 강요할 정도로 반인륜적인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주민들이 돈을 갖다주거나 소를 끌고가야 그 짓을 중단했던 것이다. 월정리의 4·3 피해가 주변마을보다 비교적 적은 이유는 주민과 토벌대간의 상납을 통한 교섭이 잘 이루어졌던 것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월정리는 서청특별중대의 반인륜적인 탄압과 함덕에서의 집단학살을 겪으며 4·3으로 인해 4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월정리는 4·3 당시에는 340여세대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250여호로 줄어들었다. 마을 주민들은 11중대가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시작된 인근마을 주민들에 대한 참혹한 인권유린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고봉수(2007년 87세) 할아버지는 4·3 당시 민보단 활동을 하며 월정학교에 주둔했던 11중대의 악행을 거의 보았다. 그 자신도 오늘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날을 보내며 4·3 기간을 보냈다.
“11중대의 본부는 함덕대대였주. 1948년 12월 말, 중앙국민학교에 50명 가량 군인들이 주둔했는데 우리 월정 말고도 주변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 하영 죽였주. 군인들의 먹을 물을 조합별로 여자들이 허벅에 길어 나르는 등, 그 겨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주.”
“당시 강영희(태흥 출신) 선생은 향사 앞에 있는 민보단 사무실에 와서 '곧 군인들에게 잡혀 죽을 것 같다' 라는 말을 했는데 3일 후에 죽더라.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향사에 있는 우리들에게 책임자를 물으며 모이라고 해서 모이니까 물몰개로 끌고 갔주. 거기에는 강영희, 김지한(하도 출신) 선생이 있었어. 군인들은 '저들이 폭도니까, 대창으로 찔러 죽일 사람은 손들라' 라고 하자 모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명령을 거부하면 곧 죽음이니까. 그 착한 선생들을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하는 심정을 헤아려 주시오.”그들은 결국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다.(한라일보 071016)
“당시 저는 18세에 결혼하고 분가해서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위험한 일이 많아서 젊은 사람들은 마을을 피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숨어 사는 사람들 20명을 마을에서 설득하여 17명을 데려왔습니다.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습니다. 곧 풀려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동복-북촌 사이에서 군인들이 습격당한 사건이 벌어지자 월정리 사람 17명을 1렬로 세워서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2∼3일 후에 연고자들이 가서 시신을 찾아왔고 연고자 없는 사람은 마을에서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귀순하는 게 불안하다고 계속 숨어 있던 사람들은 살아 남았습니다.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있는 11중대는 이북 사람들인데 군인들을 위안한다고 노래도 좀 부르는 여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마을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니까 군인들이 와서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리고 바로 쏘아 죽일 듯했습니다. 민보단에서는 술, 돼지고기, 소라 등으로 군인들을 달랬습니다. 처녀들도 위안한다고 해서 노래도 불러 주었는데 군인들이 그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데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험악한 시절이었습니다.”(2010년『월정리』79세 곽◎◎ 증언)
2003년말에 발간된 『제주4·3유적』에는 월정리 마을성담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을 주민의 안내로 남아 있는 성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영철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구좌읍 인구 및 세대현황
참 재미 있는 공간을 보면 항공사진을 보면 진짜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아 수 있다는 생각이든다.
흰색 부분이 모래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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